내가 걸어 온 길

어릴 적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한의학 공부와 다시 시작한 수험생활까지, 이종한 원장이 자신의 배움과 선택을 돌아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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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의 이종한 원장
한의학에서 물리학으로, 배움을 이어 온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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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내가 걸어 온 길

1.한의대입학과 한의대 다닐 시절

나는 어릴 때부터 과학이 좋고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내 간절한 꿈을 부모님도 알기에 내가 처음에 과학기술대학 특차모집에 지원했을때 크게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우리 고등학교에서 3명이 지원했는데 1명만 합격하고 나는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게다가 대입 학력고사에서 그다지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았고, 내가 마음에 들어가는 합격진학이 힘든 상황이 되었다.

원서 쓰는 날이 다가오고 학교와 학과 선택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께서 술은 한잔 하고 오셔서는 한의사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한의대는 6년만 공부해도 되고 나와서 돈벌이를 쉽게 할 수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까지 할 수 있으니 좋다고 한의대를 보내자고 한 것이다.

옆에 있던 할머니께서 무릎을 치시면서 그게 딱 좋다고 하셨다. 나는 우리 집에서 5대 종손이고 아들이 귀한 집안에 큰아들이라서 할머니께서 특히 나한테 관심이 많으셨다.

내가 고3때 할머니께서 사주를 보러가셨는데 내가 큰 장사를 한다고 했는데 할머니 원서를 쓸 때 생각해보니 약장사가 큰 장사라고 하시면서 우리 손자가 큰 약장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꿈에 부풀어 하셨고, 아버지와 할머니마음은 이미 내가 큰 한의원을 하는 한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아들이어서 원서를 쓰게 되었는데, 한의대학을 졸업하면 내가 나중에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1987년 3월에 대구한의대 한의예과에 입학을 하게 되어 한의학에 발을 들려놓게 되었다.

이후 부모님께서는 설마 6년이 지났는데 그때까지 그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2.한의대 졸업 후 재수, 삼수시절

1993년 이른 봄에 한의대를 졸업하고 물리학 공부를 할려고 했으나 군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군의관으로 근무를 하면 장교로 근무하니 편하고 당당할 수 있지만 3년이 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단기 사병(방위병)으로 군복무를 결심했다. 단기 사병으로 근무하면 17개월여만 근무하면 되기 때문에 다시 수능을 준비할 시간여유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군복무기간 동안 공부는 할 수 없었고, 그대신 몸은 많이 건강해졌다.

체중도 늘었고, 체력도 좋아짐을 느꼈다. 군복무 전에 체중이 52킬로그램정도 나갔는데, 군 복무 후에 보니 체중이 65킬로그램정도 나갔다. 그리고 생각도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조금은 느긋해지기도 했다.

1994년 여름 군복무를 마치고 대입공부를 결심했지만 집에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아버지께서 고향(통영)에서 한의원 개원을 종용하셨다.

나는 더 큰 공부를 위해서 서울로 떠났다. 서울로 떠날 때 내 수중에 가진 돈이 40만원이 안되었다. 그 당시 하숙비가 1개월에 30만원 이었고, 이부자리를 사고 나니 5만원이 남지 않았다.

이 상태로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병원근무나 이곳저곳 직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1995년 봄에 어렵게 빚을 내서 구로동에 병상3개의 조그만 한의원을 인수하여 진료실을 열었다.

하지만 집은 구로동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1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빚을 어느 정도 청산하게 되었다.

그 중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임신도 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결혼도 했으니 이제 마음잡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길 원하셨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물리공부를 갈망했고, 1996년 여름, 개원한지 1년 여 만에 구로동 한의원을 청산하였다. 한의원 청산한 자금으로 광명시에 조그마한 아파트 전세를 구했고, 드디어 대입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3년 반 만이다. 밤에는 영등포의 한방병원에서 당직 근무를 서고 낮에는 대입학원을 다녔다.

첫해 공부는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모자랐다. 한의대는 수학공부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수학공부를 다시 시작해야하는 부담이 컸다.

그리고 1986년에 봤던 학력고사와 1996년의 수학능력시험은 시험경향이 전혀 달라서 적응이 어려웠다. 하지만 탐구영역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학원 수업시간에만 열심히 따라가도 성적은 잘 나왔다.

저녁에는 당직 근무 중에 당직실 방에서 영어와 수학만 공부를 했다. 또 다행스러운 것은 영어 문제가 문법보다 독해 위주라는 것이 재수의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인지 첫 해 성적은 형편없이 나왔다.

중간에 편입이나 대학원들도 알아보고 외국으로 곧바로 유학 갈 수 있는 길이 없는지도 살펴봤다.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확신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하는 공부인지라 걱정이 많았다. 이 즈음에 나는 무려 입학시험 13회 연속 탈락을 맛보는 시기였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후 대학에 편입, 수능, 대학원입시, 심지어 학원입학 시험까지 시험만 보면 탈락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1회 탈락에도 추가 합격이 있으니 학격여부 확인전화를 여러번 하게 되고, 전화 할 때마다 “불합격입니다”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게 되어 원래 인생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나한테 주어진 길은 이정도인가?’ 싶기도 하고, ‘처 자식과 부모님 봉양하며 평범하게 살라는 계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한번 만 더 해보고 싶었다. 다시 한 해 더 공부하게 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 그 때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서 야구를 하게 되어 많은 재수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야구 보러 매점을 가고, 어떤 학생들은 연애를 하고, 또 어떤 학생들은 잘 나온 모의고사 성적을 보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결혼도 했고, 돈벌이도 바빠서 시간이 촉박하지만 다른 곳에 신경을 안쓰게 되니 어떻게 보면 집중이 더 잘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1997년 수능은 다소 쉬운데다가 내가 아는 부분이 많이 나와서인지 성적이 좋게 나왔고, 원하는 대학들에 입학 가능한 성적이 되었다.

1998년 1월은 마음이 참 따뜻한 겨울이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대학과 학과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기에.

3.물리학과 다닐 시절

1998년, 1999년은 나한테는 힘들었지만 참 행복한 나날이었다. 밤에는 야간당직 근무를 서고 낮에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 한의대는 단과 대학이라서 한의학공부 외에는 다른 학문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지만,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은 내가 평소에 원하던 자연과학 공부를 원없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었다.

특히 13개과가 자연과학부에 들어 있어서 내가 관심 있었던 천문학, 지질학, 해양학, 기상학, 물리학 외에도 통계학, 전산학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자연과학공부를 골고루 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자연과학 외에도 법학이나 경영학공부등도 재미가 있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학점에 신경 쓰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수강신청과 상관없이 여러 교실을 다니며 듣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1998년 우리나라 경제가 무너지면서 IMF 체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도산을 하게 되었고, 내가 보증을 섰던 사촌과 부모님도 사업실패를 하셨다.

더구나 광명시에 구한 집주인도 사업실패를 하는 바람에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계약에 대한 경험이 없던 차에 잘못된 계약을 한 것도 한 몫을 해서 더더욱 힘들게 되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안해주는 힘든 상황에서 경매에 넘어간 집을 낙찰받아서 보증금 일부라도 건지도록 도와준 주변 선배님의 도움도 있었다.

하지만 적은 돈으로 집도 구해야하고, 부모님 생계도 책임져야하고, 사촌형님의 보증문제로 야간당직을 서던 병원 월급이 압류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시작된 대학생활을 휴학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999년 말부터 준비해서 2000년 1월 초부터 관악구에 한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자리를 못 잡아서인지 1년간 진료를 했지만 개원 시 내었던 빚도 못 갚았다.

고스란히 앉은 자리에서 1년 세월을 까먹게 된 것이다.

휴학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돈을 끌어보아서 낼 수 있는 최대의 빚을 내서 봉천동 인근으로 이전개원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주4회 나가고 한의원에 주3회 나가서 진료를 했다. 나머지는 다른 한의사를 고용해서 주4일 진료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모험이었다. 원장이 주3일밖에 지키지 않는 한의원에 환자분들이 진료받으러 올 것인가?

만일 여기서 다시 실패한다면 더 이상 학교는 다닐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었다.

다행하게도 한의원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서 수익을 내고 빚을 갚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성적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시작한 공부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2001년 11월 말에 드디어 빚을 다 갚고 보니 월세 아파트에 6식구가 살고 있게 된 것이다.

2003년 여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기 까지 이렇게 빚과 시간과 싸우면서 지내왔다.

4.물리학과 졸업 후의 진로

물리학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우연히 물리학부 내에 한의물리를 하시는 교수님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서 인사를 하고 교수님을 뵙게 되어 한의물리 실험실에서 몇 년간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자연과학에만 심취한 나에게 한의학에 대한 긍정의 마음을 가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서양 자연과학은 세상을 움직이고 세상은 서양사상과 그 속에서 파생된 서양과학으로 돌아가게 되어, 서양 학문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세계사를 배워도 서양역사를 중심으로 배우고 철학을 배워도 서양철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워도 서양과학을 배우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학문의 바탕은 서양사상을 의 고 관점으로 쳐다보니 서양의 것이 아닌 것은 서양사상의 관점으로 재단을 하다보니 제대로 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가령 오리토끼와 붕어가 있다고 보면 항상 토끼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글은 작성 당시의 경험과 견해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의 건강 상태와 진료에 관한 판단은 의료진과 상담해 주세요.

이종한 원장

글과 강의 이종한오렌지한의원 원장 · 한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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